여러가지 문제들과 병폐를 안고 있는 현대 사회 속에서 많은 현대인들이 이른바 ‘미니멀리즘’의 생활 방식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현대 사회가 강요하는 ‘문명인’의 모습에 어떻게든 다가서려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 결국은 허상인, 이름 뿐인 ‘성공’을 쫓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큰 집과 좋은 차, 안정된 직장 등의 소비재들이 진정한 삶의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의 이유와 그들의 삶을 보다 의미있게 해 주는 생활 방식을 보다 적극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불필요한 물질이나 허례허식을 벗어버리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삶에 있어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집을 버리고 유랑을 하기도 하고 서른 세벌의 옷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기부하는 등 보다 의미 있는 삶의 형태와 방식을 전파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집회를 열기도 한다. 이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들만을 갖자는 철학, 까다로운 의식을 지양하고 신앙의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종교적인 트렌드 등 현대 사회의 여러 단면에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 양상이다.
시각 예술이나 음악 그리고 다른 매체에서 보여지듯 미니멀리즘(Minimalism)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미술 운동으로 자리매김한 사조이다. 특히 미국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주로 활동한 작가들인 도날드 저드(Donald Judd), 존 맥라켄(John McCracken), 댄 플래빈(Dan Flavin),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등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흔히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부흥하여 포스트 미니멀리즘(Post-minimalism)으로 가는 교두보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러시아의 화가, 말레비치(Kazimir Malevich)가 만든 ‘검은 사각형(The Black Square, 1915)’에서 보여진 것처럼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즘에 나타난 생략, 단순화 등의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척자로 간주되는 작가, 이브 클라인(Yves Klein)의 지극히 파란 캔버스가 성모 마리아의 푸른 옷에 관한 상징이라는 것은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 정밀 감식의 결과 훨씬 복잡다단한 구성과 색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확인된 아이러니만큼이나 심오한 듯하다. 작가가 가졌을 의도가 무엇이었든 미니멀리즘 작품들이 보기보다 많은 것들을 내포하고 있음은 자명해보인다.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고 대상의 본질만을 표현하고자 하는 목적 하에 제작된 것만이 미니멀리즘이라 확언할 수 있을까? 미니멀리즘이 발발한 거의 직후에 일어난 운동인 포스트 미니멀리즘이 전자의 미학이나 개념을 참조하면서도 보다 다양한 작품과 작가를 포함하며 예술가 개개인의 경향을 더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면 뉴 밀레니엄 시대의 미니멀리즘은 어떠해야 할까?
미니멀리즘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국의 예술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는 자신의 캔버스나 그로부터 파생되는 의미에 대해 극도의 간결함으로 무장하며 우리가 그 위에서 보는 것은 물감과 붓질의 흔적일 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의 회화에 대해 다니던 학교에서 물감을 공짜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일축한 그는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으로 유명한 미국의 화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적, 무작위적인 붓질을 통해 자신감을 내보이며 자신만의 화법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형태, 색채, 그리고 구성 등 회화의 형식적 요소를 통해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며 예술가로서의 자유를 표현하였다. 그는 미니멀리즘 계열의 블랙 시리즈에 안주하지 않고 컴퓨터 디자인, 3D 프린팅 등 새로운 표현법을 연구하였으며 후에 다양한 색채를 구사하며 형태와 질감 등이 진화하여 관객에게 더욱 다가가는 작품들을 다수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 세계의 진화는 미니멀리즘이 ‘단순함’에 관한 것이라는 개념을 뛰어넘는 개인의 정서적 수련를 거친 객관화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철학자, 아서 단토(Arthur Danto)가 정의한 바와 같이 미니멀리즘과 포스트 미니멀리즘을 구분 짓는 요소들은 그것들의 유쾌하거나 엉뚱한, 색정적이면서도 기계적인 답습을 거부하는 반복에 있다. 포스트 미니멀리즘은 특정한 형태를 구현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표시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포스트 미니멀리스트인 작가, 에바 헤쎄(Eva Hesse)의 작품 ‘Contingent’은 미니멀리즘 계열의 작품의 형식을 차용하면서도 새로운 재료에 대한 그녀의 실험을 보여준다. 이렇듯 더욱 복잡다단한 형식으로 발전하는 미니멀리즘의 계보와 진화의 흔적은 뉴 밀레니엄 시대의 작가들의 작품 속에 직,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비단 시각적 형식 뿐만 아니라 개인의 생활 방식이나 인류에 끼치는 긍정적 측면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독일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안은지 작가는 강렬한 독일 표현주의의 전통을 작품에 강하게 드리우고 있다. 물을 많이 섞어 흘러내리는 듯한 수채화, 빠른 필치의 기괴하면서도 감성적인 드로잉을 그리던 그녀는 점점 대상의 색, 분위기 등의 본질만을 잡아내어 추상적으로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Milky Way, Acrylic on canvas, 33.4x24.2cm, Eunji An, 2019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미묘한 움직임을 표현하는 듯 작가 장숙경의 작품은 자연과 호흡하는 예술, 그 조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과정과 태도를 더욱 중요시하며 그 속에서 나타나는 우연적 효과에 중점을 두는 작업을 펼쳐 왔다. 그러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간결하고 절제된 형식 속에서 자연의 고요한 울림을 전하며 자신만의 미감을 표출하는 데에 주력한 작품들을 위주로 작업해오고 있다.
지난 여름, 57x76cm, Mixed media, Sookkyung Jang, 2005
대구와 제주도를 오가며 자신의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는 작가 정인희는 ‘The True Artists Helps the World by Revealing Mystic Truths’라는 다소 냉소적인 문구가 적힌 네온 사인을 샌프란시스코의 버려진 식료품점에 전시하였던 작가, 브루스 노만(Bruce Nauman)처럼 언어를 하나의 조형 요소로 사용한다. 스튜디오를 자의적 혹은 강제적으로 자신을 가두는 곳이라 여긴다는 그녀는 ‘The Prison Note’라 적은 네온 사인을 페업한 담배 공장의 사원 아파트의 지하 보일러룸에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캔버스나 철판 위에 무의식적인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옥중 일기를 작품화하는 등 다양한 형식을 지향한다. 그녀의 최근 작품은 ‘책’이라는 상징물의 외형을 다양한 색상과 형태로 시각화한 작품으로 조형 요소로서의 글과 그 의미에 대한 보다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
Red Book, 54x46cm, Acrylic on tinplate, expoxy, text drawing, Inhee Jeong, 2019
채온 작가의 작품 성향은 많은 다른 작가와 작품들을 연상시키면서도 그 다양한 작품들 속에 그만의 미묘한 접점을 찾을 수 있는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형광색의 꽃, 불안한 인물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면서도 울림을 주는 색채의 조합, 특유의 즉흥성과 리듬감, 빠른 필치 등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무엇을 그리고자 했을까에 대한 강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그가 애초에 주제로 삼는 대상은 재현과는 아무 관계 없는, 그 모든 마법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시각적 매개물인 듯 그의 제스처와 과정 속에서 새로 진화한다. 푸른 숲의 어떤 면을 보았던 것일까? 작가의 빠르고 무수한 붓질, 캔버스 위에 남겨지는 물감 자국들은 대상에 대한 무심함을 가장한 격한 감정의 발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청둥오리, Drawing on paper, 15.5x10.5cm, Cheon, 2019
수행을 하듯 무채색의 화면에 그리기와 지우기를 반복하며 자신의 불안과 상흔을 기록하고 새로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작가 최현실의 작품은 ‘기억’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것이 비단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수평선 상에 있는 것이며 그렇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무의식의 발현임을 이야기하려는 듯하다. 화면에 무수히 찍은 점들, 하얀 오일스틱으로 그들을 지우면서 그리는 그녀만의 회화의 방식은 그 중첩으로 인해 화면에 묘한 공간감을 더하며 심적인 빛과 어두움을 평면 위에 풀어 놓고 있다.
Space No.2, Oil stick on canvas, 53x45cm, Hyunsil Choi, 2019
허지안 작가는 빛을 머금은 색면 추상 계열의 회화 작품을 전개해오고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그림’이 어딘가 존재하지 않는 곳, 즉 낙원과 같은 곳으로 데려다주는 통로라고 믿는다는 미국의 화가, 브라이스 마든(Brice Marden)을 연상시키며 그림에 속에 종교적 색채를 드리우기도 한다. 그녀의 그림은 브라이스 마든이 이야기하는 빛이나 대지 등을 물감이라는 매체를 통해 캔버스 위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질서있게 구현된 결과물이다.
Untitled, Acrylic on canvas, 116.8x91.0cm, Jian Hur, 2019
참여 작가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미술의 역사 속에서 보여진 미니멀리즘의 흔적들을 그들의 작품 속에 머금고 있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화시키고 있다. 이들의 작품은 이 시대의 미니멀리즘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미니멀리즘이 표방하는 단순함 속에 실은 한 개인의 복잡한 이야기가 녹아있음을 호소하고 있다.
거장들의 단색화로 국한될 수 있는 우리나라의 미니멀리즘에 대해 이들의 작품은 ‘미니멀리즘’이라는 사조가 이제는 미술의 한 형식이라는 측면을 뛰어넘어 우리 자신의 생활 양식을 돌아보게 하는 한 흐름이라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 즉 허울뿐인 ‘버리기’, ‘비우기’가 아닌 ‘본질’, ‘요체’, ‘정수’를 찾는 것, 이들의 예술에 대한 여정은 미니멀리즘의 생활 양식이 결국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 리알티 아트스페이스 김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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